원추리 심던 날

원추리를 심었다.

복지관에서 우연히 만나 서실 가족이 된 친구동생이, 이야기 끝에 자기 집에 원추리가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노란 원추리 꽃과 할머니의 얼굴이 함께 오버랩이 되었다.

그곳 팔봉에는, 마당가 우물 옆에 봄이면 노란 수선화 꽃이 덩어리져서 피었었다.

그 옆에는 원추리도 있었고 붓꽃도 있었다.

특별나게 꽃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는 채전 밭을 만들어 푸성귀를 길러먹고,

채전 밭보다 조금 작게 화단을 가꾸어서 채송화, 봉숭화, 분꽃, 과꽃 등 온갖 우리 꽃들을 심어 두었었다.

그런데 유달리 우물가에는 수선화, 붓꽃, 원추리, 칸나 등 난초과의 꽃들을 심어두셨고 맨 끝에다가는 맨드라미를 심으셨다.

그리고는 봄이 오면 늘 호미를 가지고 풀을 메시면서, 혼자 나지막하게 소리를 읊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원추리의 싹이 올라오면 그 싹을 베어 나물을 무쳐 주시고는 하셔서, 원추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그냥 모른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동생에게 원추리 몇 뿌리를 얻기로 하고, 오늘 그의 집에 가서 원추리를 얻어다가 울타리 가에 심었다.

함께 덤으로 뜯어준 원추리 어린 싹은 무쳐서 나물을 해먹고...

하지만 누나가 시골출신이 아니어서 그 맛을 못 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 입맛이 도회지 맛에 젖어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할머니의 손맛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때의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이모할머니시다. 외할머니의 동생이셨다.

슬하에 자녀가 없이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청상으로 지내시다 늦게 익산으로 재취를 가신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시지는 못하셨지만, 행동거지가 항상 바르셨고 인정이 많으셨으며 옳고 그름은 확실히 판단을 하시던 강한 성격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다.

그러신 분이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외지에 나가서 할아버지 혼자사시는 곳으로 재취를 가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항상 한복만을 입으셨으며, 여름에도 노란 삼베나 하얀 모시옷만을 입으셨고 모정에 나가 시조를 하시거나 가끔 낚싯대를 둘러메고 낚시를 가시는 것이 일과이셨을 뿐이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을의 전통양반이셨고 농사란 뒷짐지고 밭둑, 논둑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눈 농사를 하셨다.

진짜 생원과에라도 등과를 하신 양반이시지는 몰라도 최 생원이시라나 뭐라나...

어떤 때는 멋쟁이이시다가도 왠지 허세만 부리는 별 볼일 없는 거짓 양반인 것 같기도 하는 그런 양반이셨다.

재취를 가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아무런 의지할 곳이 없었던 할머니는 나를 데려다 친손자 이상으로 아껴주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게 쏟으셨던 것이다.

집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가족들이 나누어져 살아야할 때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셨고, 그래서 나의 어린 감성은 시골의 자연스러운 정서에 동화되어질 수밖에 없었고 할머니도 나의 놀이에는 전혀 간섭을 하시지 않으시면서, 다치지만 않고 자유스럽게 놀 수 있도록 방목하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용근이 성한테 완전히 맡겨두셨다.

그래서 나는 팔봉의 메깥 바람과 햇빛이, 나비랑 새랑 꽃들과 함께 나를 길렀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 집에는 마시지 못하고 허드레 물로만 쓰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왜 허드레 물로만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물이 맑지가 않아서 그러셨는가 보다.

하지만 그 우물가의 모습은 얼마나 예뻤는지, 용근이 성이 볼일이 있어 집에 오지 않는 날에는 하루 종일 우물가에서 누렁이하고 놀고 물장난하고 꽃구경하는 것이 나의 하루 일의 전부였다.

누렁이도 꽃밭에 들어가고 토방에 올라오기만 하면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는 줄 알고 절대로 토방위에는 올라오지를 않고 채전 밭이나 꽃밭에는 들어가지를 않았고, 그런 날은 대밭에도 들어가지 않고 종일 나만 따라 다니면서 함께 놀았다.

우물가에는 절구통을 잘라놓은 모양의 제법 큰 돌확이 있었다.

이곳에도 할머니는 물옥잠을 기르셨고, 나는 그 확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누렁이하고 놀았었다.

그 뒤쪽의 도랑 옆을 쭉 따라서 수선화와 붓꽃, 원추리, 칸나 등을 심어두어서, 봄이면 유달리 다른 새싹들보다 파란 싹들이 뾰족하게 솟아나오는 모습이 그리도 신기하고 예뻐서, 나는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어떤 때는 용근이성 혼자서 산에 가기도 했다.

하루하루 다르게 키가 커가는 모습과 나날이 색이 더 진해지는 새싹들을 보면, 할머니가 왜

특별히 난초 류의 아이들을 우물가에 집중적으로 심어 기르셨는지를 이제는 알 것 같다.

할머니는 당신이 하루 종일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우물가에서 언제나 보실 수 있는, 새로운 봄이면 새 생명의 용틀임과 희망을 싹 틔우는 난초 류 들에게서 다른 꽃들의 새싹들보다 더 힘찬 삶과 예쁜 꿈을 보셨을 것이다.

자기의 아무런 피붙이도 없이 혼자서 남모르는 시골에서 마치 은둔하다시피 살고계시니 왜 당신인들 슬프기도 하고 한인들 맺혀있지 않으시겠는가?

그 한과 원을 새로이 돋아나는, 유달리 뾰족하며 싱싱하게 올라오는 그 새싹들로부터 카다르시스를 느끼셨는지 모른다.

우물가에 빨래를 하시며, 우물가에서 쌀을 씻으시며, 우물가에서 걸레를 빨며,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하시며....

그 할머니는 늘 그렇게 그 꽃들을 보고 계셨던 것 일 것이다.

그러다 이른 봄날 양지쪽에서 수선화는 별 모양의 노란 꽃을 피우고, 이것이 지고나면 머지않아 연두색의 붓 모양의 붓꽃봉오리가 맺히고, 그러다 보라색의 귀부인 모양의 붓꽃이 피고, 그리고 나면 키가 많이 자란 원추리가 노랑꽃을 아침에 피우고 저녁에는 지고 다음 아침에는 다른 애가 또 꽃을 피우고, 칸나도 빨간 꽃을 넙죽하게 피어대고....

그렇게 할머니는 순차적으로 피는 꽃들을 보시며 당신의 삶을 그 속에 이야기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나는 할머니가 그 꽃밭의 풀을 메시며 등에 기대어 따라다니던 나를 돌아보시면서 “ 창열아, 너는 더 크면 이 붓꽃처럼 점잖게 귀한 모습으로 자라 거라.” 하셨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할머니, 이제 원추리나물 못 먹어?” 했더니 “이제는 세서 못 먹고 내년 봄에 해 주마.”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다음 해에 할머니하고 헤어져서 집에 왔다.

그 후 할머니를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원추리하고 할머니하고는 함께 떠오른다.

오늘 담장 밑 환하게 양지바른 곳에 원추리를 심었다.

내년 봄엔 할머니도 원추리나물을 함께 잡수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물을 흠뻑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