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우리 첫사랑의 전령사였다.

나의 열 손톱에는 봉숭아꽃 물이 곱게 들어있다.

이제 색도 점점 엷어지고 반달모양의 붉은 모습이 얼마 남지를 않았다.

첫눈이 올 때 까지는 남아 있을 런지?

어느 날 누나가 일하는 클라이언트 집 앞뜰에 봉숭아가 많이 피었다기에,

손톱에 물을 들이게 따오라고 하였다.

누나가 따온 꽃과 잎에 백반가루를 넣어서 곱게 빻았다.

예전에는 아주까리 잎이나 호박잎으로 봉숭아 찧은 것을 손가락에 싸매었는데 비닐 랩으로 싸도 된다기에 그렇게 하였다.

우리 집에는 호박잎은 많지만 아주까리는 없다.

예전엔 그리도 흔하여 많은 집 울타리 옆에 심어져있던 아주까리가, 요즈음에는 보기도 어려워졌다.

넓은 잎에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수술 많은 꽃들이..

여름에는 그 쭈글거리는 열매 속에 까맣고 반짝이는 매끈한 씨앗들이 있었다.

이 씨앗으로 아주까리기름을 짰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엄마가 주인인 꽃밭이 있었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토방 밑에 여러 가지 색들의 채송화를 심어두어서 우리는 채송화 꽃을 따 책속에 넣어 꽃 책갈피를 만들기도 하였다.

우리는 엄마가 가꾸어놓은 꽃들을 구경만 하고, 어쩌다 이쁜 마음이 생기면 풀이나 뽑아주는 구경꾼이었다.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칸나, 수선화, 붓꽃 등을 심었고,

울타리에는 하얀 조롱박 꽃이 가득 피어서, 가을이면 호로병모양의 조롱박이 주렁주렁 달렸고 토방 밑에는 채송화들이 색색으로 피었었다.

작은 꽃들이 어우러져 피기 시작하면, 집은 온통 꽃밭이었고 벌들의 놀이터였다.

그래서 이웃들은 우리 집을 ‘꽃집’이라고까지 불렀다.

그 중에 분꽃은,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유별나고 한 송이에도 여러 색이 섞여있어 너무 예뻐서 누나와 여동생들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오므라지는 분꽃이 빨리 씨앗을 맺기를 기다렸다.

까만 분꽃의 씨앗은 속이 하얘서, 그 씨앗을 가루 내어 얼굴에 바르면 얼굴이 뽀얗고 예뻐진다고 씨앗이 까맣게 여물 때만을 기다렸다.

봉숭아꽃이 필 때면, 우리 형제자매들의 손톱은 온통 빨갛게 물이 들었다.

봉숭아꽃은 붉은색 뿐 아니라 흰색도 있고 섞여서 복합으로 피는 것도 있지만, 유달리 붉은색 꽃만으로 잎과 섞어 백반을 넣고 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이는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한꺼번에 물을 들이려면 한 채반의 봉숭아꽃이 필요하지만, 엄마는 떨어진 꽃만 주워서 사용할 뿐 절대로 떨어지지 않은 꽃은 따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니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과 흰 꽃을 모두 주워 모아 두었다가 섞어 찧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엄마는 “흰 꽃으로 물을 들이면, 흰 색으로 손톱이 물들까?”하고 우리들에게 물어 보시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빨간색이 된다느니, 흰색이 된다느니, 분홍색이 된다느니 하며 각자 색의 혼합에 관한 미술 실력까지 동원해서 서로 우기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네일아트를 꿈꾸고 칼라풀한 색이 되기를 바라면서 잠을 잔다.

천연 네일아트의 선구자들이었다.

찧어서 붙이고 아주까리 잎으로 손가락을 싸매서 실로 칭칭 동여매어 놓고도 잠자리에서 풀어질까봐 가슴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잠을 자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면 봉숭아 찧은 것은 손톱에서 밀려나서 손가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손톱에는 흰색 꽃물이 들었고. 손가락에는 빨간색 꽃물이 들었다며 놀리시곤 하였다.

그래서 총천연색 네일아트는 실패하는 것이다.

누가 물이 더 멋있게 잘 들었는지를 비교해 보며, 물이 덜든 손톱은 저녁에 다시 보수공사를 하였다.

이렇게 하고 학교에 가면, 우리가 남매, 자매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눈에 우리들이 한 식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전부 손톱이 빨간 색이니 우리 가족들은 발가락이 닮은 것이 아니고 손톱이 닮아있었다.

어렸을 적의 이런 추억이,

사춘기에 들어서는 더 애틋하였으며, 처음들인 봉숭아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며....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손톱도 깍지를 않고 간수했건만, 용의검사에 걸려 강제로 잘려 나가면~~ 그 선생님은 누이들의 첫사랑의 방해꾼이었다.

나만 그런 생각으로 물을 들인 것은 아니었고, 터울이 비슷한 남매, 자매들인지라 전부 그런 기대를 할 나이들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비밀과 기다림을 발설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누이들의 짝들이 그 때의 봉숭아물 덕분인지는 나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도 반 남은 반달모양의 붉은색 손톱이, 첫 눈 올 때까지는 그대로 견뎌주기를 기대한다.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엄마는 우리에게 사랑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아름다운 미학”을 가르쳐 주신 문학소녀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봉숭아는 엄마의 첫사랑 꽃인 것이다.

아버지셨을까?

엄마의 첫사랑이? ㅎㅎㅎ

발칙한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