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혼과 한 그리고 사랑

깊어가는 가을만큼이나 높은 예술의 깊이와 너름을 깨달은 하루였다.

오늘은 아침 일찍, 그저께 국전 서예작가이신 박 선생님이 빌려주신 서예 책을 복사 재본하기위하여 복지관과 다른 방향의 재본소로 향했다.

그저께 복지관을 결석하고 나들이를 다녀왔고, 어제도 공부 도중에 빠져나와 국화를 보러갔었다.

오늘은 공부를 하고 체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박 선생님이 빌려주신 책의 복사가 우선이었다.

50여년이 넘어 지금은 절판이 된 서예 책을 아끼고 숨겨두셨던 박 선생님이 내게 넌지시 건네주신 것이다.

워낙 정결하고 깐깐하신 성격이라 서실에서도 조금은 회피당하고 계신 분이, 내게 넌지시 건네주시며 “송 선생, 이 책 한번 보시게.” 하신다.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책의 모본이었다.

빌려주시기를 청하고 복사와 재본을 하고 돌려드려도 되겠느냐 하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이런 절판이 된 책을 건네주신 박 선생님의, 평소 말씀이 없으셨던 사랑이 너무 고마워 빨리 돌려 드려야 하겠기에...

아침에는 복지관과는 다른 방향인 제본소로 먼저 향했다.

책의 복사와 제본을 상의하고 또 다른 곳인 미륵사지로 향하였다.

미륵사지는 차로 한 40여분만 가면 되는 곳이고, 또 내가 백제를 좋아해서 자주 가는 곳이다. 옛 미륵사지의 서탑 복원이 완전히 끝나지 않고, 모과나무가 심겨져서 떨어진 모과열매를 주워와 모과차를 만들기도 하던 가을이라 무작정 그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추수가 끝난 시골들이 을씨년스러웠지만, 낮이 되며 한껏 기온이 올라 윗옷을 벗고 운전을 하였다.

아직도 공사 터파기를 하는지, 울타리로 둘러쌓고 있던 아름드리 모과나무를 전부 베어내어서 떨어진 모과는 한 개도 없었지만, 너른 잔디밭과 맑은 바람이 오늘은 달리 더 상쾌한 것 같았다.

오늘은 유물 전시관으로 발을 돌려 백제의 청동기도 보고, 옹기그릇들도 보았고, 사리함에서 함께 출토된 옥구슬도 보았으며 금박으로 만든 족집게도 보았다.

“그래, 이것이 바로 예술의 혼이구나.”

15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그들을 볼 수가 있으니, 이것이 예술이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그들을 찾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생각하며 천천히 돌고 있는데 문화관광 해설사가 말을 붙인다.

혼자 처량해 보였는지? 가까이 다가와 준다.

서로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냥 영감이라고 했다.

혼자는 식당에 잘 가지 않는 성격이라 그냥 서실로 돌아왔다.

미륵사지에 있는데, 서실 형님들이 찾는 전화가 계속된다.

왜, 공부 안하고 싸돌아다니느냐? 는 둥~~

뭔 일이 있느냐는 둥~~

갑자기 요즘 왜 그러냐는 둥~~~,

슬럼프냐는 둥~~

그중 어느 형님이 정곡을 찌르신다.

“혼자 있는 놈이 자주 안보이면, 심란해지니 이따가 라도 서실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ㅎㅎㅎ

그러니 안 들어 갈수가 없어서, 공부시간에 야간반 학생처럼 들어가서 너스레를 떨고... 두어시간을 혼자 공부했다.

오늘 전통춤 발표회를 갖는 동료의 회장에 들르기 위해서 그냥 서실에서 시간을 벌었다.

바로 그거였다!

서실에서 바로 앞에 앉아 한문 행서를 쓰며 넘겨짚으며 농담을 걸던 그 여인이...

거기에서 그렇게 변신이 될 줄을 몰랐다.

학생들 발표회나, 졸업 전에 초대받아 가보곤 했었던 것이 전통춤 사위를 본 전부였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것이 아니었고, 그녀도 내 앞에 앉아서 다소곳이 글을 쓰던 여인이 아니었다.

깜깜한 무대에 빛이 들어오며 목탁소리가 들릴 때, 하양 장삼을 걸치고 바닥에 엎디어서 구도하는 그 여인은~~~ 아찔했다.

한참을 엎디어 기도하며 해탈을 기원하듯 한 이가, 일어서 장삼자락을 너울거리며 고깔을 흔들거릴 때는 조지훈의 승무가 보였다.

놀랐다. 처음 승무였다.

그리고는 여러 제자들의 군무들이...

아무소리도 낼 수 없어 숨을 죽이고 보면서 박수를 줄 시간도 놓치고 있었다.

아~~ 저것이 구도구나! 저것이 염원이구나!

느끼며 너울거리는 장삼자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미끄러지듯 내어딛는 버선 발 만을 바라보았다.

장삼과 버선발과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그 여인의 시선만...

그러더니 대감놀이에서는 갑자가 펄쩍거리는 무당이 되어, 빠른 가락에 맞추어 펄쩍거리며 뛰고 내닫는다.

어린 시절 보았던 작두 밟던 무당의 모습이었다.

구도자에서 갑자기 무당으로...

그러더니 살풀이춤이 시작되었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바로 정화수 장독대에 떠 올리시고 추운 새벽달 밤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하셨던 것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바로 엄마가 바라시던 살풀이가 거기에 있었으니!

승무, 무당, 살풀이 ..이것의 공통은 한과 원이었다.

그것이 전부 그 속에 있었고, 엄마가 그 속에 있었고, 내 맞은편 그 여인은 엄마였던 것이다. 놀랐다. 이제 어떻게 보지?

마지막으로 7명이 나와 추던 삼고무는, 오고무가 아니고 구고무가 아니어도 충분히 일률적인 통일된 가락으로 우리에게 멋진 가을을 주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깊은 가을만큼 깊은 한과 혼과 정과 사랑을 보았다.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밤을 보낸 첫날이었다.

멋진 날이었다.